구한말 일제에 맞서 의병활동 벌인 최택현 일가

의병궐기 계획 중 밀고로 일본 헌병에 붙잡혀 네 분 참살

  • 입력 2010.08.16 11:05
  • 기자명 정리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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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례문과 고목 및 최택현 일가를 기린 오래된 비석
▲ 정례문과 고목 및 최택현 일가를 기린 오래된 비석
3년전 재경나주향우회장을 지낸 최병석씨와 나주 수성최씨 종친들은 재야사학자이자 후세변호사 연구모임의 정준영 회장을 찾았다.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순국한 최택현(崔澤鉉 당시 48세) 최윤룡(崔潤龍 당시 26세) 최광현(崔匡鉉 당시 55세) 최병현(崔柄鉉 당시 47세) 네 분의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하여 독립유공자로 지정받기 위해서다. 최택현과 최윤룡은 부자간이고 최광현과 최병현은 최택현의 4촌이다. 나주지역 명문가인 수성(隋城) 최씨의 일가 네 분은 '탕' 소리와 함께 일본군이 쏜 총에 살해됐다.

최병석씨와 정준영씨는 네 분의 독립유공자 지정에 많은 노력과 자료 수집에 열정을 다 바쳤다. 당시 국가보훈처에서는 "일본 측의 공식 재판 기록이 없다"며 독립유공자 지정에 난색을 표한 상태였다.

재야사학자 정준영씨는 "당시 일제는 밀고자 보호 등을 위해 재판기록 자체를 안 남기고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국립중앙도서관 특별코너에 보관되어 있는 1914년판 기우만(奇宇萬)선생의 송사(松沙)문집 권(卷)38 묘갈명57과 1912년 난와 오계수(吳繼洙)선생의 세보지장록에 최택현 일가의 활동이 나온다고 말한다. 호남창의(의병)대장을 지낸 기우만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손자로 구한말 의병운동을 주도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정준영씨는 최택현 일가의 의병활동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지난 3월 23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제2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日本은 아직도 '고종이 을사조약의 주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그 조약의 체결 주체인 '고종황제의 서명과 국새의 날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만 찍혀 있을 뿐 고종 황제의 비준이 빠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약은 국제법상 원칙 무효(無效)임이 명백하다. 구한말 당시 국내외로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대궐 안팎에서도 위와 같은 가공할 사기극이 연출된 것을 보면 삼남지방이나 이곳 나주시 다시면 충신열사들을 비인간적으로 몰살시킨 것쯤이야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가 아니였겠는가?

이 고을 다시면에서 보기 드문 '솟을 대문집, 동몽교관댁'이라고 하면 저 멀리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오른팔, 흥양현감 최희량장군의 십대손들로 지금도 이곳 마을 어른들의 자랑거리로 뭇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신성한 국토방위'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 멀리 구한말, 국가누란의 위기에 이곳 나주시 다시면 사내대장부의 역사적인 소명의식만은 지금도 그 어느 지방의 충신열사보다 못지않았다.

당시 실록을 기본자료 삼아 이를 알기 쉽게 풀이해보면 "일본 낭인들에게 우리 국모를 빼앗기고 국토마저 유린당하고 구한국 군대마저 강재해산 당함에 끓어오르는 의분을 억제할 수 없어 1907년 가을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의병들이 봉기할 때 창고에는 그 의병들을 배부르게 먹일 곡식이 한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 격한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윤룡(潤龍)의 부친 택현(澤鉉)씨는 위풍이 강직(剛直)하고 당당하여 종형 광현(匡鉉)씨와 종제 병현(炳鉉)씨 등과 분기가 탱천하여 "왜적을 섬멸하지 않으면 나도 생존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굳게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公)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인근 영산포 현병대에 이를 제보하니 왜적들이 크게 기뻐하며 그 밀고자에게 큰 상(賞)을 주었다.

영산포 현병대는 작전상 이 마을 북쪽으로 돌면서 피아간에 혈전(血道)을 벌린 후 이곳 '동촌마을(다시면)'에 이르렀을 때가 1909년 8월8일이었다.

그들은 최택현 선생 부자와 광현, 병현 형제 4인을 꽁꽁 묶어 인근 대곡촌으로 끌고 가면서 불문곡직하고 무수히 구타하면서 "공모한자가 몇 명인가? 이실직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꾀었으나 최택현 선생은 "지금까지 너희 왜적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우리 국민 모두가 너 왜적들의 간을 씹고 싶은데 어찌하여 나에게 공모한자를 묻는고. 오늘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인 듯 하니 죽인다고 하여 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고 말했다.

더 이상 캐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헌병들은 다음날 네 분 의사를 무안군(함평군) 진례면(학교면) 망월촌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버렸으니 그때가 기유(己酉)년 1909년 8월 10일(음)이라고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특별코너에 보관되어 있는 1914년판 기우만(奇宇萬)선생의 송사(松沙)문집과 1912년 난와 오계수(吳繼洙)선생의 세보지장록에 나와있는 기록이다.

현장목격자 최윤로 선생께서는 위 네 분 모두 무안군 진례면에서 피살되기 직전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는 최씨세보 지장록(庚辰 1940년)과도 모두 일치하고 있다.

위 모든 자료가 서슬이 시퍼렇던 1909년 일제 초기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의 기록이라 그 기록을 잘못 남겼다가 일본헌병대에 발각될 경우 그 후손들에게 미칠 환란을 자초할 것은 뻔 한일이라, 기왕 만신창이가 된 판국에 죽음의 문턱이라 할지라도 살리고 싶은 박민수(朴珉洙의 부대현황:1980년 나주군지 참조) 등의 소재지를 그놈들에게 '이실직고' 할리 만무한 것이다.

박민수 의병장과 위 네 분 가운데 최병현(崔炳鉉) 의사와의 관련 자료를 애써 소개하자면 박 의병장의 선친 박찬옥(朴贊郁) 선생과 최의사의 선친 최기오(崔基五) 선생은 1894년 갑오년 나주목사 민종열(閔鍾烈)을 도와 '나주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의리에 죽고 사는 위 네 분의 숭고한 의병정신에 감동한 박민수는 그 이후 위 네 분이 돌아가신 '동촌'마을로 숨어 들어와 상당기간 숙식을 제공 받았다는 사실도 해방이후에야 겨우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속에서 그 문학적 소질까지 엿볼 수 있다고 하지만 호남 창의대장 송사 기우만선생의 문집에서도 그 유학자적인 윤리 도덕을 실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최택현 의사의 집안이 일가삼강(一家三綱)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1909년 8월 10일(음) 위 네 분 의사의 장례를 치루고난 일주일후 나주 임씨(崔潤龍의사의 처) 또한 투신자살한 사실을 송사선생은 이를 열부(烈婦)로 격상시키면서 "부친은 나라를 구하다고 죽고(父死於忠)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다가 죽고(子死於孝)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었으니(婦死於烈)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各盡其道) 한 집안에서 일가삼강(一家三綱)을 이루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다시면 동곡리 동촌마을에 '유인(孺人) 나주 임(林)씨'의 비석이 서있다. 비석은 대부분 뒷면에 망자(亡者)의 간단한 약력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임씨의 비석엔 아무런 글을 남기지 않았다. 정준영씨는 "일제강점기 36년간 의병활동하다 처형된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내용을 어찌 동네 한가운데 있는 비석에 남길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라 크로아지의 1905년 5월 21일에 찍은 의병공개학살 장면이 입증하고 있듯이 이 같은 학살장면은 1910년 한일합방 될 때까지 무법천지로 공공연히 자행된 대표적인 '직결처분 장면'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박은식(朴殷植1859~1926)선생의 한국통사(韓國通史)가 이를 사실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최택현 일가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에 앞장서온 재야사학자 정준영씨는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일가족이 3명까지 참살 당한 기록은 있지만 5명이 함께 몰살한 기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정씨는 우리지역 궁삼면토지투쟁과도 관계가 깊은 '일본판 쉰들러 리스트'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를 연구하면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 복원에 앞장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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