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나주읍성을 돌아보자

  • 입력 2011.12.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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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끼는 낙엽들이 가을마당을 더욱 짙게 색칠하고 있다.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산과 가로수가 자줏빛과 노란빛으로 수놓는다.

학생운동의 시발점인 옛 나주역사에서 출발해 4대문을 중심으로 나주읍성을 돌아 볼 참이다.

고려시대에 축성된 나주읍성은 서울 도성과 같은 4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갖춘 전라도의 대표적 석성으로 둘레 3.7㎞에 면적은 29만4천753평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규모는 조선 초 당시 나주목사 김춘경이 완성했고 세조 3년에 성을 확장, 임진왜란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으나 조선민족 말살 정책을 편 일제에 의해 1910년대에 강제로 철거됐거나 훼손됐다. 현재는 4대문 가운데 남고문과 동점문이 복원됐고 서성문은 복원중이다.

아직 4대문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복원되고 공사가 진행된 곳을 찾아간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달렸다. 남고문로를 따라 보행자겸용도로를 달려 나주제일교회를 지나 남고문에 이르렀다.

기자가 어렸을 때 많이 놀던 어린이 놀이터였던 곳이다. 1993년에 복원돼 사적 제 337호로 지정되어있다. 지붕이 화려하며 옆에서 보면 여덟 팔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돼 있다. 남고문에서 남문로를 따라 달리자 오른편으로 옛 나주경찰서가 보인다. 이곳은 등록문화재 34호로 지정돼 있다. 1910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많은 우국지사들이 고충을 겪었던 곳이다. 나주소방서로 쓰이다 지금은 나주사랑시민회를 비롯해 사회단체가 들어와 있다.

조금 더 가면 공공도서관이다. 여기부터는 자전거 전용도로구간이 13번국도로 해서 시청 쪽으로 연결돼있다. 이 공공도서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나주천이 반긴다. 나주천의 금남교를 건너 금계길을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목사내아와 정수루 그리고 금성관이 있다.



나주의 보물 금성관, 금학헌, 정수루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로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는 순조 25년(1825년) 건립된 것으로 건물 구조는 전통 양식인 한옥 ㄷ자형이다.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관내에 벼락을 맞은 팽나무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정수루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89호로 조선시대 나주목 관아의 정문이다. 그 현판의 뜻으로 보아 사람들이 관아에 들어가기 전에 의관을 단정하게 하라는 의미가 있다.

금성관은 지방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돼 있다. 객사는 고려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 또한 전남지방 객사 가운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객사는 지방에서 왕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됐을 때 유림이 모여 곡을 했으며 광주민주화운동 때 나주시민이 모여 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주변에 매일시장과 곰탕거리가 형성돼 있어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현종이 지나던 사매기길



금성관을 끼고 돌면 방앗간과 담벼락사이가 연애고샅길이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골목길에 붙여진 이름이였지만 지금은 그 당시보다 좀 넓어졌다. 당시에 젊은 총각들이 길 끝에 숨어 있다가 예쁜 처녀들이 지나가면 반대편으로 돌아 로맨스를 만들었던 거리이다.

그길 바로 옆길이 사매기 길이다.

고려 때 현종이 거란족을 피해 나주로 몽진했을 때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건너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고 '사마교가 있는 길'이 세월이 흘러 사매기 길이 됐다. 이 길에는 수세거부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사매기 길을 지나 향교길을 가다보면 서성문이 나온다.



동점문에 올라 영산강을 보자



서성문은 사적 제337호로 한참 공사 중이다.

서성문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동점문에서 나주목관아, 나주향교로 이어지는 이른바 '천년 역사의 길' 가꾸기를 통해 전통담장 설치와 전선지중화 등의 사업도 함께 병행한다는 계획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근방의 길들이 직선화 돼있다. 뻥뻥 뚫려 있어 시원한 감은 있지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차가 다니기 편리한 길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여유를 즐기며 거닐 수 있는 길이라면 좋겠다.

향교길로 해서 국도1호선을 쭉 달렸다. 오른쪽 길옆에 보이는 집이 박정자 선생이 사는 작업장겸 자택이다. 국도1호선을 달리고 달리다 중앙병원도 옆으로 두고서 왼편으로 나주경찰서와 오일시장도 지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동점문이 나온다.

동점문은 나주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과 몸을 섞는 하류 쪽에 위치한다. 동점문은 옹성이 설치된 2층 문루다. 과거 영산강 뱃길도, 한양에서 오는 육로도 동문으로 이어졌다. 고려 말 정도전이 '친명 정책'을 주장하다 회진현(현재 다시면 일대)으로 귀양 올 때도 이 문을 지났다. 그가 당시 문루에 올라 읽었다는 '유부노서'(나주 원로들에게 이르는 글)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었다. '동점문 복원기'와 현판 글씨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썼다.

동점문은 '나주천 물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서경' 하서 우공편'에서 유래됐으며 나주사람의 정신이 작은 개울에서 시작돼 큰 바다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중환의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나주를 '소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작은 한양이라는 뜻이다. 금성산과 삼각산, 영산강과 한강, 나주천과 청계천, 남산 등 나주의 지세가 서울의 지형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서성문과 북망문이 세워져 온전히 4대문이 복원되면 소경으로 가치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자전거는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정부의 정책과 국민의 건강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외국에 비해 아직 자전거 정책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집을 나설 때 자동차 열쇠가 아닌 자전거 헬멧을 먼저 찾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이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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