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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지역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④

나주 농민들의 일제에 맞선 토지회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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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12.19 21:31
  • 기자명 나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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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수탈의 상징이었던 영산포 포구를 지나 왕곡면 장산마을 앞 국도13호선에 접해있는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기념공원.

역사는 우리에게 오늘을 직시하고 만들고 내일을 알려주지만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듯 기념비 주변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기념공원은 1991년 11월 5일 조성됐다. 구한말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탈에 대항하여 투쟁을 벌인 궁삼면 농민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나주의 의연한 정신으로 오늘을 살고 희망의 나주를 건설하는데 그 밑받침으로 삼기 위해서다.

공원에는 '나주 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라 새겨진 높이 3.3m의 기념비와 농민운동을 형상화한 부조물 2기 그리고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전성창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오늘날 나주의 행정지명에는 궁삼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정지명이 아니라 당시 농민들이 되찾고자 했던 지죽면·욱곡면·상곡면(현재의 영산포·왕곡면·세지면·봉황면) 일대를 통틀어 말하는 명칭이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나주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나주는 고종이 1895년 8도를 23관찰부로 개혁할 때 관찰부가 설치되면서 인근 16개 군을 관할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896년 초 단발령에 반발한 향리층과 양반층의 의병이 일어났다. 정부의 진위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1896년 도제의 실시와 함께 나주는 1등 군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전남의 도청 소재지는 광주가 되었다. 이때 금마·원정·종남·비음면은 영암군, 삼향면은 무안군, 장본·적량·여황면은 함평군, 대화면은 장성군, 오산면은 광주군으로 나주군도로 불리는 32개의 섬은 지도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제도 개정 때에 남평군이 폐군되어 나주군에 편입되었고 함평군의 장본·적량·여황면이 다시 나주군에 편입되었다. 1917년 양지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고 1929년 나신면을 나주면에 편입시켰다. 1931년에는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1937년에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30년 당시 나주군 인구는 14만 6,686명이었다. 이 때 일본인은 3,425명이었고 중국인은 69명이었다.

1949년에는 삼도·본량·평동면이 광산군으로 편입되었고 1981년 전두환정권의 도농통합정책으로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쳐 금성시(1985년 나주시로 개칭)로 승격시키면서 나주군에서 분리되었다.

나주는 영산강을 끼고 있는 광활한 나주평야의 중심지이다.

1897년 목포 개항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인들의 합법적인 진출이 하락된 것이다. 이때부터 영산포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나주평야의 토지를 사들였다. 일본인 지주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등대가 있는 영산포는 포구로써 활발한 활동을 한 지역이어서 일본인들은 내륙지역에서 상업 활동을 전개하는 거점이 되었다.

또한 영산포에는 고깃배, 소금배, 옹기배, 젓갈배들이 물때마다 드나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나주지역은 면화재배가 매우 활발한 곳이어서 농가 경제에서 쌀농사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업도 활발하여 누에고치 생산이 전남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나주의 경제활동은 영산포?나주?남평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영산포는 수출입화물의 집산지였다. 영산포는 나주뿐만 아니라 인근 각 군의 생산물이 집산되어 목포로 운반되는 중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주는 영산포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발달뿐만 아니라 정미, 조면, 생사, 장유, 주류 등의 공업도 발달하였다. 이밖에도 짚제품, 가마니, 죽제품, 직물, 목제품 관련 수공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가마니는 전국 각지에 판매되어 호평을 받았다. 전남지역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나주.

하지만 이러한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던 이들은 일본인 지주와 일본인 소유의 회사들이었다.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지배와 수탈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18년 사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토지를 바탕으로 총독부 세원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토지매매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를 완비하였다.

이때부터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의 최대 적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총독부가 소유한 막대한 토지의 상당 부분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졌다. 이제 농업생산기반을 확보한 일본인들의 동척을 통한 농업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울러 일제는 1920년대 들어 조선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하였다. 즉 조선의 쌀 생산을 늘려 대량의 쌀을 헐값으로 일본으로 실어가고자 한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수많은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국유지 불하, 해변과 강변의 간척 및 개간, 토지의 전당과 매매 등을 통하여 토지를 집적하여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가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은 호남지방이었다. 특히 나주평야와 호남평야(김제ㆍ옥구평야)는 일본인의 진출이 집중된 곳이었다.

일재는 나주평야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용이하게 실어가기 위하여 철도와 신작로를 개설하였다. 전주에서 군산까지의 도로를 1908년 10월에 개통하고 이리에서 목포까지 호남선 철도를 1914년 3년 만에 개통하였다. 이러한 도로와 철도를 통해 매년 수십 수백만 섬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갔다.



식민지의 거점 영산포



일본인들은 1902년부터 영산포에 들어와 상주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부터 관리들이 주로 거주했던 나주읍과는 달리 영산포를 택한 것은 수운을 통한 교통의 발달로 각종 농수산물이 집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과 유교 그리고 대읍으로서 전통적인 질서가 잡힌 나주에 진출하는 것보다 나주와 인접해 있고 수운의 요지에 있으면서도 개발되지 않았던 영산포에 진출하는 것이 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나주와 영산포는 3.4km로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일본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주읍내에도 일부 진출하여 상권을 장악해갔다. 일본인들은 나주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1910년대 신작로는 낸다는 구실로 나주읍성을 철거하였다.

영산포에는 우편수취소(1903), 영산포 일본인회(1906), 일인소학교(1907), 영산포 헌병부대(1909), 일본사찰(1910),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1910) 등 여러 식민기구가 설치되었다. 1930년경에 이르면 영산포의 시가지가 나주의 시가지보다 더 커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인 지주와 동척의 침탈



일제는 토지와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를 영산포에 세웠다. 지금도 영산포 내륙등대 뒤편에 그 문서고가 그대로 남아있다. 동척을 통해 질 좋은 나주평야의 쌀을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영산포 이민을 적극 유도함으로서 지주와 상인 등 많은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정착하게 하였다.

그 결과 1930년 나주군 조선인들의 1인당 소유 토지는 310평에 불과했는데 일본인의 1인당 소유 토지는 10,010평에 이르렀다. 영산면의 경우에는 전체 토지 5,880정보 가운데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74.3%에 달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인 지주들의 나주지역 침투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나주 등지에서 9,031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나주에는 동척 외에도 동산농장, 카마타주식회사, 조선실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농업회사들이 진출해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계획적 진출로 1930년대 영산포는 수출입화물의 집산지로서 매우 활발한 경제활동을 보였다. 나주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결국 모든 경제는 소수의 일본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영산포는 마치 일본 내의 일본인사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주지역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청년운동, 노동·농민운동, 신간회운동, 산업운동, 야학과 강습회운동 등 각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1·3학생독립운동이 나주에서 발단되었던 것이다.



토지수탈에 맞선 나주농민의 저항



당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구한말부터 시작된 궁삼면 토지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되었다.

사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탐관오리의 부패가 극심하던 조선 말기 나주?영산포 지역에서 가뭄 피해가 잦아 농민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던 땅의 세금을 한 브로커가 대신 내준다는 명목으로 땅을 착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60여 년 동안 지속된 ‘궁삼면 토지분쟁’의 발단이다.

1890년 경저리 전성창은 상곡?욱곡?지죽면의 가뭄 피해를 입은 땅들의 조세를 대신 납부해주면서 기만적으로 1,400여 두락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아버렸다.(경저리는 서울에 파견되어 경저에 머무르는 지방관청의 아전. 지방관청의 일을 대행하여 중앙과 지방 관청 사이의 연락 업무, 세공의 납부, 지방관의 공적?사적인 부탁의 수행 등을 담당하였는데 그 피해가 커 원성이 높았다)

이때부터 3개 면의 농민들과 전성창 사이에는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었다. 전성창은 1898년 이 토지를 경선궁(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의 궁)에 팔아넘겨버렸다. 이후 소유권분쟁은 경선궁과 개 면민 사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 땅을 경선궁으로부터 매수하였다. 이제 3개 면의 농민들과 동척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농민들은 그 하수인인 동척과 본격적인 토지회수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법벋투쟁을 시작하였다.

1910년대 농민들은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토지소유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식민시대에 법은 일본인을 위한 수탈의 법이지 조선농민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농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동척의 탄압과 재판의 패소뿐이었다.

농민들은 이제 비합법투쟁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동척의 악랄한 탄압 속에서 농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25년 궁삼면 농민조합(농민회라고도 함)을 출범시켰다. 토지회수운동부도 조직했다. 농민들은 면민대회 개최, 소작료불납운동 등을 통하여 결속력을 강화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의 투쟁이 격렬해지자 동척과 총독부당국은 유화책을 폈다. 1926년 4월 ‘분양’이라는 기만적 방법을 농민들에게 제시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분양’이란 계쟁지 2,500정보 가운데 묘?전?대지 100정보는 무상양여, 논 2,000정보 가운데 1,000정보는 동척이 계속 소유하고 1,000정보는 법정지가의 2배로서 분양하며 지가는 연 1할 이자를 붙여 10년 이내에 연부균등 상환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세가 불리했던 농민들은 본래 무상반환을 주장해왔으나 일단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혹한 분양조건과 논의 절반에 달하는 1,000정보가 여전히 소작지로 남게 되었기 때문에 문제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하여 상환조건의 완화, 소작료의 감하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일제말기까지 1,000정보의 땅은 여전히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문제 해결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졌다.

해방이 되자 동척의 땅은 모두 미군정의 신한공사로 넘어갔다. 이에 농민들은 신한공사에 대한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면서 농민들에게 농지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남한의 농지개혁이 이루어지던 195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그것도 유상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1880년대부터 1950년에 이르기 까지 전개된 궁삼면의 토지회수투쟁은 나주농민들의 굽히지 않은 강인한 항일정신의 발로이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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