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획

나주지역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⑤

궁삼면 토지회수운동에 이은 수세투쟁

글 싣는 순서

■ 수세거부운동의 발로인

다시면수리조합 반대투쟁

■ 확산되는 나주의 민족운동

  • 입력 2011.12.19 21:47
  • 기자명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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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약탈이 중심이 된 나주지역은 특히 농민들의 피해가 극심한 곳이었다. 일제의 침탈이 진행될수록 나주농민들의 저항도 다양한 형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궁삼면토지회수투쟁과 다시면수리조합 반대투쟁, 야학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민족의식이 발산되었다. 그 가운데 일제의 직접수탈에 맞서 싸운 형태가 다시면에서 발생한 수세투쟁이다. 그러나 수세투쟁이 조직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수몰지 투쟁에 머문 것은 당시 민족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대목이다.

그렇다면 나주농민들의 일제에 대한 투쟁의 발단을 어디에서부터 찾아야 할까.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근본원인을 찾을 수 있다.

러일전쟁 직후부터 수많은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국유지 불하, 해변과 강변의 간척 및 개간, 토지의 전당과 매매 등을 통하여 토지를 집적하여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가 가장 많이 진출한 곳은 호남지방이었다. 특히 나주평야와 호남평야(김제ㆍ옥구평야)는 그들의 진출이 집중된 곳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영산포지역은 일제의 침탈이 가장 심한 곳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의 진출로 영산포는 일본의 도시를 옮겨 놓은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화 되어갔다. 특히 일본은 토지와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를 영산포에 세워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영산포 이민을 적극 유도함으로서 지주와 상인 등 많은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정착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나주에서 9,031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나주에는 동산농장, 카마타주식회사, 조선실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농업회사들이 진출해 있었다.

3·1운동 이후 식민통치의 강압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다소 완화되자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경제자립운동 등 다양한 방향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나주지역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궁삼면토지회수투쟁 그리고 다시면 수리조합반대투쟁이다.

나주지역의 노동·농민운동은 1924년 나주노농공영회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나주노농공영회는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교육사업을 계획했다. 나주청년회에서 경영하던 노동야학을 직접 운영한 것이다. 나주청년회는 야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는 물론 나신면 석현리에 있는 일본인 스즈키의 양잠 노동자의 파업 중재, 농민들의 소작쟁의,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나주노농공영회는 1926년 조선노농총동맹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분리 방침에 의하여 나주노동연맹과 나주농민연맹으로 나뉘어졌다. 나주노동연맹은 노동자들의 계몽운동과 노동야학 운영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노동자 차별철폐, 8시간 노동시간제 등을 실천하기 위해 자유노동조합을 창립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을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당시 나주경찰서가 조합의 선언과 강령이 불온하고 규약 속에 ‘계급 쟁투’라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시킨 것이다.

나주지역의 농민·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궁삼면민들의 토지회수투쟁과 다시면 수리조합반대투쟁, 임금문제를 둘러싼 나주 인쇄공 파업 등이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경제투쟁이 전개된 곳이 나주지역이다. 나주민족운동의 중심이 된 신간회의 활동으로 많은 경제투쟁이 전개되었다. 신간회 나주지회 김창용 위원장과 박준삼ㆍ양장주 위원 등은 주민들로부터 약 7천원의 자본금을 모아 나주협동상회를 창설하였다. 일본상점에 의해 장악된 나주읍내의 상권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나주읍내의 상권은 거의 일본상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협동상회는 일본인 상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운영을 계속했으나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억압 속에서 결국 10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다시면 수리조합반대투쟁의 발단



1931년 다시면 수리조합반대투쟁은 일제 지배당국과 나주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인 지주 쿠로즈미가 다시면에 수리조합을 만들 계획을 세우면서 부터다. 일제의 수탈이 수리조합을 통해 더욱 첨예하게 전개되는 과정인 것이다. 쿠로즈미는 당시 다시면 면장을 앞세워 한해와 수해피해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도로부터 수리조합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30년 4월 12일 수리조합을 결성하고 스스로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 1월 나주군청 회의실에서 열린 다시수리조합 총회에서 농민들은 3년간 가뭄 피해를 입은 다시면에서 앞으로 매두락 6원씩 수세를 내게 된다면 너무 부담이 크므로 당분간 수리조합건설공사를 연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쿠로즈미 등은 이 공사를 강행하였다. 2월 20일 쿠로즈미와 나주경찰서 보안계장 등이 공사구역 시찰을 위해 다시면 현장에 나타났다. 인근의 농민들은 산에 올라가 나팔을 불어 수백여 명의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농민들은 현장을 방문한 쿠로즈미 일행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였다. 이에 나주경찰서는 30여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들을 가까스로 해산시켰다. 이날 모인 군중 가운데에는 특히 수리조합의 저수지를 건설함으로써 전답과 가옥이 수몰될 처지에 놓인 이들이 많았다.



다시면 수리조합 반대투쟁과 그 좌절



1931년 2월 25일에는 다시면의 수몰전답 관계 농민 백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수리조합 반대투쟁을 시위를 통해서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농민들은 당시 군청이 있던 금성관으로 향했다. 나주군수와 면담을 위해 무리를 지어 읍내로 행진하였다. 경찰은 이 행렬을 막으려 하였으나 농민들이 워낙 강경하여 끝내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군수가 읍 입구까지 나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피해보상 액수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액수를 계약서를 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수가 불응하자 농민들은 다시 읍내까지 행진해 들어갔다. 농민들의 시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도 경찰부가 출동했다. 시위대는 후지이 경부로부터 훗날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듣고 돌아갔다.

3월 16일 나주군수는 대표자 11인을 군청으로 초청하여 피해 호 140여 호 중 70호에 한하여 1호당 60원의 이전료에 논 매 평당 2전 8리, 밭 매 평당 1전 6리의 소작료 피해보상금과 그 외 수개 조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표들은 그런 정도의 보상으로는 140여 호의 피해농민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협상은 결렬되고 수리조합측은 공사를 강행하기 위하여 18일 군수실에서 평의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이 군수실로 진입하여 회의를 방해하고 소란을 피우는 소동을 벌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실 점거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에 분함을 참지 못한 농민들은 20일 경찰의 제지를 뚫고 영산포의 쿠로즈미의 집으로 달려가 문전에서 항의농성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농민들의 반대투쟁은 역부족으로 끝나고 나주군수와 쿠로즈미 측의 의도는 관철되었다. 농민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수리조합 저수지공사는 강행되었다.

다시수리조합투쟁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수세문제와 수몰지 문제가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투쟁의 쟁점은 수세문제보다는 수몰지 문제로 옮겨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일제당국과 지주 측에게 밀리고 농민들의 한이 서린 수세는 1987년 수세거부투쟁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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