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향약으로

마을 공동체를

이루다

■ 구름산에 대동세상 대통을 이루자

■ 신 향약운동으로 공동체를 이루다

■ 다양한 체험프로그램 운영

■ 친구따라 시골마을 들어온 사람들

  • 입력 2011.12.19 21:58
  • 기자명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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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대덕면 운산리 저심마을. 담양에서 28km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화순군 북면과 곡성 옥과에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동네 뒤쪽으로 해발 612m의 수양산과 만덕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안고 해발 300여 미터의 위치에 있어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된 산골마을이다.

40여 가구에 8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최근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에만 해도 주민 대부분이 70대 중반이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 이하가 8명이나 되고 50대 이하가 전체 주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는 마을. 도대체 이 마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저심마을은 이제 운수대통마을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8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된 뒤 마을 주민들의 합의를 통해 마을 이름을 운수대통마을로 바꾼 것이다.

저심마을은 원래 마을이 멧돼지 형국이라 저심(猪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멧돼지 형국에서 멧돼지의 피해가 많고 멧돼지가 주는 이미지가 좋지 않아 닥나무 저(楮)로 바꾸어 저심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은 닥나무가 많아서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종이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닥나무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예로부터 대농인 지주가 없고 밭농사와 누에치기 그리고 종이 만들기로 생업을 이어온 마을이지만 구한말에는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병사를 모아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주요 활동 무대로 삼은 의로운 마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심마을을 운수대통마을로 이름을 바꾼 것은 지난 2008년이다. 운산리의 운자를 따고 물이 맑아 수자를 따서 운수라 짓고 대동세상을 이루기 위해 소통을 넘어 대통을 한다는 의미에서 운수대통이라고 했다.

대통은 대나무의 고장인 담양을 상징하기 위해서도 적절하여 주민회의를 통해 결정 한 것이다. 대통은 소통을 초월해 주민들이 상호 존중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운수대통마을에 처음으로 변화를 일으킨 사람은 서울 생활을 접고 귀농한 오봉록 우리콩농원 대표다. 귀농한 뒤 마을 이장을 거쳐 행복마을 추진위원장을 맡아 녹색농촌 체험마을 선정에 기초를 닦았다. 그는 서울에서 '되살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10여년 전 이를 실천했다.

현재 운수대통마을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영민씨는 친구인 오봉록 전 위원장을 따라 이 마을에 귀촌하였다.

80년대 초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한 뒤 용접공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 뒤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장을 역임한 윤영민씨는 악화된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농촌생활을 희망했고 마침 친구인 오봉록씨의 권유로 운수대통마을로 들어오게 되었다.

운수대통마을로 들어온 그는 지역의 주민들과 청소년들에게 농촌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를 전하기 위해 '대덕 참 삶 공동체'를 설립해 '농업은 안 된다'는 생각과 '농촌은 끝났다'는 주민들의 패배의식을 바꾸는데 노력했다.

하지만 면단위 공동체는 범위와 단위가 너무 커서 마을로 돌아와 마을을 중심으로 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체험마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05년 오봉록 이장은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은 젊은이들을 사랑하고 믿어주는 풍토를 이루기 위한 마을 운영규약 즉 마을 법을 제정했다.

마을법의 기초로 삼은 것이 향약이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고쳐 준다(過失相規) 예에 맞는 풍속은 서로 교환한다(禮俗相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와준다(患難相恤)에다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生命尊重)는 하나를 보탰다.

마을 운영규약은 윤영민씨가 이장이 되면서 세부적인 실천덕목을 만들어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세칙의 내용을 보면 제초제 없는 마을 만들기, 건물 신축시 주변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집 짓지 않기, 2층집 이상이나 너무 큰 집은 짓지 않기 등 시간이 지나도 명소가 될 수 있는 마을을 만든다는 것이다.

윤영민 위원장은 주민 간의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통과 과정을 중시하여 마을의 중요한 사업을 추진할 때는 주민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화백회의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화백회의 제도는 과정은 비록 더디지만 뜻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는 훨씬 강력한 힘을 갖는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농촌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속에서 비전을 찾고 있습니다. 주민들도 못할 것 없다는 분위기입니다. 자신감에 차 있죠"

그는 최근 몇 년 사이 자체적인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해 오면서 주민들의 변화돼 가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슨 일이든지 논의를 시작하면 다양한 의견이 나옵니다. 때로는 치열하게 토론도 하죠.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이 되면 모두 그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실천합니다. 생활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죠"

대통마을에서는 대부분의 농촌체험마을에서 하고 있는 농사나 자연체험 이외에도 역사, 문화예술, 음식문화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역사체험은 운수대통마을이 의병활동의 본거지임을 상기시키며 이와 관련한 역사탐방을 하고 화백회의에 대한 인식과 실습을 하게 된다. 문화 예술체험은 문인화 그리기, 한지공예품 만들기, 도예체험, 나는야 시인이라네, 짚풀공예 등이 있다.

음식문화체험은 로컬푸드와 슬로우푸드로 바르게 잘 먹고 잘사는 식습관을 체험하게 하는 것으로 콩치즈 만들기, 두부 만들기, 산야초 효소 담기, 산채음식 만들기 등이 있다.

운수대통마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마을에 귀촌한 예술인들이 문화ㆍ예술체험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는 도예가, 화가, 사진작가, 시인, 건축가 등이 들어와서 작은 예술인 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체험마을 사무장을 맡고 있는 오평후씨도 2007년 귀향한 시인으로 청소년들의 시작을 지도하고 있다.

운수대통마을 주변으로 최근 들어 수십여 명이 귀농ㆍ귀촌하여 마을 주변은 젊은 세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자



오봉록 전 위원장과 윤영민 위원장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귀농한 한상원씨와 환경운동가 한성국씨 등은 농촌에서 살면서 가난을 벗어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운수대통마을은 토양이 모래땅이 많아 벼농사가 적합하지 않고 밭이 대부분이어서 예로부터 잡곡, 콩, 산약초 등을 많이 재배했다. 무, 배추 등은 고랭지에서 재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밭농사 중심이다.

안전한 밥상과 먹거리 운동을 해왔던 그들은 이 마을이 콩을 많이 심어왔고 콩 재배에 적합한 땅이라는 점에 착안 '우리콩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무농약으로 재배한 콩으로 된장, 간장, 청국장, 고추장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재배한 콩만으로는 수요가 부족하여 부족한 콩은 이웃마을에서 사들였다. 물론 시중가격보다는 비싼 가격이다. 마을 주민들은 벼농사에서 점차 콩농사로 전환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콩 조합에서는 판매액의 5%를 마을 기금으로 내놓아 마을발전에 쓰도록 하고 있다.

운수대통마을은 외부자문위원 50여 명과 명예주민 15명 등이 있어 외부와의 소통과 협력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KT광주본부와 맺은 1사 1촌은 텃밭을 분양하여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주 마을을 방문하게 했다.

윤영민 위원장은 "마을에 귀향센터를 세워 도시민들이 귀향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멘토가 되어 줄 수 있게 할 것이며 각자의 성향에 맞는 마을을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또 윤씨는 "교육과 문화적인 여건 등으로 농촌에서 살기가 어렵다고들 얘기하는데 회원들이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오히려 참교육을 시키고 있다"면서 "이웃과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농촌은 더 없이 좋은 산 교육장"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마을의 경제적 토대를 탄탄히 다지면서 전통문화를 되살려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대동(大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싶다"는 윤씨는 "운산리를 주민 모두가 행복한 대동마을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다짐한다.



[인터뷰]



"헌신적이고 봉사하는 마을지도자 필요"



▲고향마을도 아닌데 귀촌한지 몇 년도 되지 않아 마을이장을 맡아 체험마을사업 등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윤영민 : 고향이 아니라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을은 다양한 성씨와 비슷한 살림살이로 주민들이 대부분 열린 사고와 이해를 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 나이 드신 분들은 관행적인 농사에 길들어져 있어서 새로운 것을 추진하는데 난관이 많았을 것인데요? 예를 들어 제초제 없는 마을은 모든 주민이 동의하고 참여해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윤영민 : 주민들을 모시고 견학과 학습을 반복하며 후손들과 우리의 삶터를 훼손하지 말아야한다는데 이해하게 했습니다. 친환경 농업에 따른 부족한 일손은 젊은이들의 울력으로 어르신들을 돕고 늦게 출발한 만큼 다른 지역과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 전국적으로 체험마을이 수백여 개가 넘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기대한 성과에 미흡한 곳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윤영민 : 그 마을에 헌신적이고 봉사하는 자세를 가진 지도자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마을과 주민들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준 기자

najuk2010@hanmail.net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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