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 광주학생운동의 주역들

  • 입력 2011.12.1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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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과 1984년이란 소설로 유명한 영국 작가이자 언론인인 조지 오웰의 말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주지역의 격동의 세월 100년은 굴곡도 깊고 그늘도 짙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고통과의 시절에서의 광주학생독립운동, 수 많은 양민 희생사건, 농민들의 처절한 궁삼면토지회수투쟁으로부터 이어져 온 수세투쟁.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 독재에 대한 항거 그리고 5ㆍ18 민중항쟁까지 이 모든 과거의 역사청산은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때가 있다. 이제 민중의 역사인 나주의 역사를 재정립할 때이다. 늦었지만 새로운 밝고 힘찬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이번 기획취재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제강점기 시대 투쟁으로 온 몸을 헌신했던 사람들의 활동내용이다. 깊이 있게 취재하지 못한 점은 후일을 기약하며 우리 나주인의 가슴에 남아 그 자랑스러움을 가졌으면 한다.

강달모 (姜達模 1909~1975)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1927년 4월에 민족차별 교육을 일삼던 일본인 선생 에다를 몰아내는데 참여하였다. 1928년 3월에는 교내학생운동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9년 광주사범학교 독서회를 조직하고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참가하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유진 (姜有鎭 1910~1950)

광주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 9월, 임종근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연구, 동지 규합, 일제로부터의 독립실현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강제 퇴학을 당하였다.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자 이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김광용 (金匡溶 1908~1979)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독립, 사회과학연구,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광주고보를 졸업한 후에도 활동을 계속 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와 관련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김보섭 (金菩燮 1911~1942)

1928년 광주 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가 모여 조직한 '독서회중앙본부'에서 조사선전위원으로 선임되어 동지포섭 및 선전보급의 일을 맡았다. 1929년 6월에는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광주고보 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광주고보생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활약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 3월에 퇴학처분을 받았고 체포되어 독서회 관련하여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박공근 (朴恭根 1899~1945)

1925년에 효종단을 창립하였다. 나주노동 공영회 중앙집행위원, 나주청년회 집행위원, 1926년에 나주노동연맹위원, 나주청년회 지육부위원, 1929년 나주청년동맹 검사위원장, 신간회나주지회 서기장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학생독립운동 당시 나주농업보습학교 독립운동 시위 사건 때 이에 가담하여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박동희 (朴東熙 1906~1961)

1929년 나주청년동맹 지부장 겸 신간회 나주지회원으로 학생독립운동에 동조하여 나주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신간회 회원 박공근 등과 함께 나주농업보습학교 및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11월 27일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 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준채 (朴準埰 1914~2001)

1929년 11.3 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되었던 10월 30일 나주역 한일학생 충돌의 주역이었다. 사촌누이 박기옥이 일본인 학생에게 희롱 당하자 이에 대항하여 한일학생 충돌이 일어났다. 이는 광부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그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양정고보로 전학했으며 옥고를 치르는 등 일경의 끈질긴 시달림을 당했다.



배종국 (裵鍾國 1924~?)

1940년 광주서중학교 2학년 때 항일학생 조직인 무등회에 가입하여 신균우, 박화진과 함께 우리말 사용을 강조하는 집단 학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학도병 지원 반대, 창씨개명 반대, 일본어 사용 반대, 강제징용 반대 등을 내걸고 1943년 5월 21일 동맹휴학에 돌입하여 6월까지 식민통치에 항거하였다. 체포된 후 1944년 9월 징역 1년6월을 언도 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손동출 (孫東出 1909~1971)

1930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 사건과 관련하여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일본 오사카로 유학하였으나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이항발, 박세공과 함께 나주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2년여 동안 구금된 끝에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송성수 (宋聖秀 1905~1972)

1928년 6월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 모리오카 배척운동을 김윤성, 김재룡 등과 주도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고 교사 최대열의 친일행동에 경고문을 보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1931년 12월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 나주ㆍ화순의 책임자로 적극적인 농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양영택 (梁永擇 1907~1982)

1929년 신간회 나주지회 서무부 간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나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27일에는 나주의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 학생을 지도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고 대구복식법원에서 징역 4월을 추가 받아 옥고를 치렀다.



유찬옥 (柳贊玉 1912~?)

문평에서 출생한 박준삼 누이의 아들. 나주농업보습학교 2학년 재학 중 1929년 11월 12일 광주고보생들의 2차 시위 이후 신간회나주지회 회원이자 나주청년회 회원인 박공근ㆍ박동희ㆍ양영택 등과 함께 나주농업보습학생 및 나주보통학교생을 규합하여 11월 27일 시위를 감행했다. 징역 10월을 언도받고 장진홍 옥사를 항의하는 소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추가형을 받아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윤승현 (尹昇鉉 1912~1950)

1928년 광주고보 재학 중 항일동맹휴학을 주도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동 혐의로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12월 한국노동자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32년에는 항일단체를 통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기관지를 발간,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광춘 (李光春 1914 ~ 2010. 4. 12)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 후쿠다에게 희롱 당하여 1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주도하여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1930년 1월 13일에는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하여 퇴학당하고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만동 (李萬童 1906~1987)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1928년 6월 26일, 일본인 교장 시라이에게 퇴학당한 이경채의 복교를 요구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7월 16일 맹휴의 취지를 선언하고 식민지 교육을 규탄하는 격문을 학생과 학부형에게 배포하였으며 전남의 각 공립보통학교장에게 항의문을 배부하였다.



이민수 (李敏洙 1926~1976)

광주서중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1941년 3월 신균우 등과 함께 학생비밀결사 무등회의 조직을 재건하고 1943년 5월에 '학병지원 반대, 창씨제도 반대, 일어상용 반대, 징병제도 반대' 등의 구호를 내걸고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영범(李翎範 1908~1950)

1929년 광주농업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농고의 대표이자 독서회 회원으로 선두에 서서 일경과 싸웠다.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6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영범 (李榮範 1909~1961)

1929년 6월 말 항일투쟁과 사회과학연구를 위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조사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시위를 선도하였으며 검거된 학생의 석방과 식민지교육제도에 항의하는 격문을 배포하고 11월 12일 2차 학생운동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창신 (李昌信 1914~1948)

나주농업보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25일 이채후, 김성남, 유찬옥 등과 신간회 나주지회 간부인 박공근 집에서 궐기할 것을 모의하였다. '대중아, 학생들아, 아느냐! 우리민족이 일제의 지배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실을'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인쇄하여 27일 전단을 뿌리며 시위에 나섰다가 검거되었으나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라 기소가 유예되었다.



정우채 (鄭瑀采 1911~1989)

공산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을 하다가 1년 휴학을 당했다.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성진회에 가입ㆍ활동하였다. 이 후 식민지노예교육을 반대한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로 광주경찰서에 수감된 후 2년 동안 복역했다. 후에 자미사를 조직, 계몽잡지를 발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홍민후 (烘敏厚 1909~1962)

나주농업보습학교 재학 중 1929년 11월 13일부터 신간회의 박공근ㆍ양영택 등과 같이 식민지 탄압정치에 항거하는 격문을 비밀 인쇄하였고 27일 나주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 및 나주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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