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폐인과 같아”

서울 낙원동 명소 ‘먹고갈래 지고갈래’ 대표 임동수씨

  • 입력 2013.05.07 11:01
  • 기자명 나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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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3가 탑골공원을 끼고 낙원동 길로 접어들면 골목 2층에 <먹고 갈래 지고 갈래>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보인다. 150평의 넒은 홀에 들어서면 귀에 익은 흘러간 노래가 라이브로 흘러나와 절로 흥겨워지는 이곳은 식사와 호프, 노래, 연주가 활발하게 이뤄져 늘 실버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종로의 명소다. 지난 4월10일 나주 봉황 출신인 임동수 대표(72)를 만났다.

실버들의 안식처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노인들은 음식이 맛있고 저렴해야 찾아와요. 내가 실버라서 잘 알죠(웃음) 여기서는 비밤밥이 5천원이고, 안주로는 번데기나 한치, 계란말이를 팔아요. 비싼 탕 안주라고 해야 7~8천원입니다. 3천원짜리 호프 한잔 시켜놓고 마음껏 얘기도 나누고 노래도 들을 수 있지요. 낮에는 생음악을, 저녁이면 무대에서 색소폰 연주도 들려주고 하니까 점심때건 저녁때건 많이 찾아옵니다.

아침 9시에 문을 열어서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데 학교 동창, 옛 친구 두셋이 부담 없이 찾아 와서 술도 즐기고 노래도 듣고 가지요. 가게 연지 9년 됐는데, 실버세대의 명소로 소문이 나서 고령화시대에 적합한 사업이라고 서울시 공무원들이 찾아왔었어요. 얼마 전에는 고려대 경영대학원 학생들이 나를 강사로 초청하겠다며 견학도 하고 갔습니다.


유흥업에 오래 종사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옛 허리우드극장 뒤편에 있던 ‘123캬바레’를 30년간 해온 사람입니다. 원래 작은 아버지와 형이 서울에서 이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작은 아버지도 제게 공부하라며 대학을 보내줘서 제가 한양대 상대를 나왔습니다. 어느날 형이 하던 나이트클럽이 부도가 났는데, 빚쟁이들이 저보고 대신 운영해서 빚을 갚으라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대신 운영하게 됐지요. 그런데 제게 돈버는 재주가 있었던지 나름 운영이 잘돼 빚을 다 갚았고, 그게 인연이 돼서 40년째 종로3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전국카바레협회 회장도 지냈고, 바르게살기 종로구 협의회 회장, 낙원동상가번영회장도 하면서 낙원동 터줏대감이 돼버렸지요(웃음).

고향을 떠나오신지는 오래되셨나요?
벌써 50년이 넘었습니다. 제가 봉황면 장성리 출신인데, 6.25때 아버지가 인민군에 돌아가시고 초등학교만 마친 뒤 15살에 무작정 상경했어요. 서울에 사시던 작은 아버지가 대학교까지 보내주셔서 그 고마움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지요.

옛날에 캬바레 운영할 때는 1주일에 하루는 쉬었기 때문에 봉황에 자주 내려갔습니다. 고향에 과수원을 사서 부지런히 땀도 흘리고 했지요. 지금 과수원에는 나를 공부시켜준 작은 아버지의 아들들이 제 대신 고향을 지키며 배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고향 사랑이 참 지극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제가 고향을 너무 사랑해서 범법자가 된 사람입니다. 나주에서 파는 담배를 사면 지방세 46%가 나주시 재정이 된다고 해서 제가 그 동안 100억원대의 담배를 사서 가게에서 팔았습니다. 덕분에 담배인삼공사에서 저를 고발해서 유통질서 위반으로 벌금을 물었지요. 그게 제 유일한 전과 기록입니다.(웃음). 그래도 고향 사랑 안할 수 있나요? 지금 우리 가게에서 쓰는 쌀이며, 오리고기가 나주산 입니다.

재작년까지 제가 ‘재경서울향우회장’을 맡아서 일한 것도 다 고향을 위한 봉사활동이고요. 제가 주위 사람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향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고향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지만 고향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은 폐인이나 다름없다.’ 라고요.

자녀교육도 잘하셨다 들었고, 주위에 봉사활동도 많이 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제가 카바레 하면서 먹고살았지만 자식들은 이 사업을 안했으면 해서 일찍부터 열심히 공부를 시켰습니다. 아들만 둘인데,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바이올린하고 첼로를 전공했지요. 그리고 제가 명절 때마다 설날에는 떡국 잔치, 추석에는 불고기 잔치를 하고 있어요. 명절에 고향에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가게 문을 열고 점심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종업원들도 다 고향을 보내니까 두 아들과 며느리들, 여성단체 자원봉사자들이 서빙을 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했지만 중요한 것이, 공짜로 드릴 때 더 잘해야 한다는 겁니다. 늘 양심과 신의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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