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희 재경향우회 상임부회장

“늘 고향이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

  • 입력 2013.05.13 13:00
  • 기자명 나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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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럽고 맑은 5월의 봄날, 서울 영등포구청역에서 이문희(72) 재경향우회 상임부회장을 만났다. 수수한 양복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그는 늘 고향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젊은 노년’이었다. 이문희 부회장은 ‘고향 후배라고 해서 편한 마음으로 만나자고 했다’며 인터뷰는 극구 사양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향 사랑이 물씬 묻어있어 염치불구하고 싣는다.


봉황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봉황면 장성리 2구 사람입니다.(웃음) 봉황(鳳凰)은 상상의 새 이름이지만 성군의 고귀한 덕치(德治)로 세상을 이끈다는 징표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 봉황면은 성스러움과 높은 덕망을 상징하는 고을이지요. 고향을 생각하면, 지금도 봉황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아마 1962년경일겁니다.

22살 한창 때 시멘트블록을 쌓아서 교실을 만들고 교사를 자청해서 일과 후에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박정희정권때 1개면마다 1개씩 중학교를 만들자는 운동이 벌어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교육열에 불타서 중학교 과정을 교육하는 공민학교 설립 운동을 벌인 것이죠. 당시 오유권, 승지행, 이명한 선생을 모셔서 함께 6년동안 교사일을 했습니다. 이명한 선생만 빼고 지금은 다 돌아가셨네요.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과 지금도 연락하시나요?
지금은 그 학생들이 60대 노년이 다 됐어요. 홍기술 목사라고 나주에서 다문화가정 분들을 기술교육시키는 분이 계신데, 그때 내 제자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성모상으로 잘 알려진 윤율리아나씨도 제가 가르쳤지요. 음으로 양으로 저를 돕는 제자들도 많습니다.

계속 사제관계를 이어갔으면 좋았을텐데 66~67년 2년간 나주에 큰 가뭄이 닥쳐서 영산강바닥이 갈라질 정도가 됐어요. 어른이고 학생이고 밀가루수제비라도 끓여먹으려고 저수지 제방공사장에 가서 일하는 바람에 학교에 오는 사람들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나주를 떠나 서울로 오게 됐지요. 그때의 그 제자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원래 교사를 하셨나요?
아니죠. 저는 체신공무원이었습니다. 상경해서는 서울에서 체신노조지부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체신전신철도노조가 강성이었지요. 체신부 저축업무가 농협으로 옮겨가면서 77년부터는 농협노조서울지부장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99년에 국방부 조달본부 농협 지점장으로 퇴직했는데, 지금의 방위사업청입니다.

 

그 무렵 IMF극복 운동이 벌어져서 제가 농혐지점장으로 있으면서 금모으기운동, 경제살리기운동에도 여러번 앞장섰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저보고 ‘노조운동 할 사람 아니다’ 많이 그러는데, 저는 평생을 운동하면서 단 한번도 주먹을 휘둘러본 적이 없습니다. 진짜 투쟁은, 주먹으로 싸우지 않고 ‘정신’으로 싸우는 겁니다. (웃음)

고향 사랑이 지극하시다고 들었습니다.
91년에 재경봉황향우회장가 창립됐어요. 제가 임동수 회장에 이어 2대 회장을 맡게 돼서 6년 동안 일했습니다. 객지에서 고향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소박한 마음이었지요. 자연히 나주시향우회도 발을 들여놓아서 지금도 상임부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직함이라는 게 무슨 영화를 누리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서 사회에 기여하라고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내가 뭘 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고향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2005년 11월에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후보지로 금천면 일대가 확정됐는데, 얼마나 기쁘던지요. 제가 향우회 소식지에 담아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삼한의 왕도인 천년목사골 나주인의 기도가 하늘을 감동시켜 희망이 찬란한 햇살로 나주가 아침을 열었다’ 이렇게 썼습니다. 향우회원들과 함께 나주에 내려가 덕룡산에 올라가서 한갑수 유치추진위원장 등과 혁신도시 유치 기원제를 올렸던 일이 그때 그렇게 눈에 밟히더라고요.

나주에 있는 고향 분들에게 뭔가 해주실 말씀이 있는지요?
2007년 7월인가 나주인들이 반목과 갈등이 심해서 ‘상생과 화합을 위한 토론회’가 열린다기에 제가 만사 제쳐놓고 내려갔습니다. 그때 제가 “고향발전의 최대의 적은 편가르기와 반목이다. 인구 30만을 자랑했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있는 혁신도시 건설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만큼 시민모두가 화합과 상생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박수가 터져 나오더라고요. 나주 사람들이 다 좋은데, 배타적 의식, 소시민적 의식이 강합니다. 대아적 자세와 포용의 자세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년을 즐겁게 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내 인생에 정년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효(孝)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 경민대학에서 효교육 자격증 공부도 했어요. 효의 밑거름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효입니다. 기회가 되면 나주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효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저는 마음은 늘 50대입니다. 나주에 있는 젊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저를 자주 불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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