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혁신도시에는 ‘革’자가 빠져 있어

박 동 박사, “나주는 태양고을, 태양광발전산업 유치해야”

  • 입력 2013.05.27 10:54
  • 기자명 나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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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6일 오후,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을 찾았다. 4층에 자리한 연구실 방문을 두드리자 박 동 연구위원(50.정치학박사)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주택가에 위치한 조용한 공간에서 ‘연구 삼매경’에 빠져있는 박 박사는 나주가 배출한 수재로 꼽힌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박사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실장을 맡아 정부청사 이전과 혁신도시 건설 등 노무현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총괄했다.

고향 얘기 좀 들려주시죠.
저는 반남면 청송리 태생입니다. 청송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지금의 반남초등학교에 병합됐지요. 반남중학교를 다녔고요, 고등학교는 순천으로 유학하서 순천고를 다녔습니다. 대학은 고려대학교 신방과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지금도 고향에 어머니가 혼자 살고 계십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광주에 살면서 어머니를 자주 찾아 뵙고 있지요. 늘 고향을 생각하고 살고 있고, 중앙에 있으면서도 나주박물관 건립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고향을 위해 나름대로 일도 좀 했습니다.


균형발전위 근무시절에 혁신도시 기획에도 관여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2003년 당시 제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정책실장으로 있으면서 노무현 정부의 국가균형발전정책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균형발전의 비전과 전략>이나 혁신도시의 모델이 된 <세계의 지역혁신체계> 등을 기획하고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165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이 제 주요 업무였지요. 그 무렵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업무가 많고 힘들어서 정말 탈진해 쓰러질 정도의 위기도 몇 번 있었습니다. 당시 공공기관 이전에 반대하는 노조위원장들을 만나설득하던 일이며, 나주에 혁신도시를 조성하기까지의 과정, 박광태 광주시장과 줄다리기 끝에 지금의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로 결론을 내기까지 등등 이런 저런 야사를 말씀드리자면 오늘 저녁까지 얘기해도 모자라지요.(웃음)


고향에 계신 많은 분들과 함께 고생을 해서 나주혁신도시를 유치했는데, 지금 건설되고 있는 혁신도시(革新都市)를 보면 한마디로 ‘혁’(革)자가 빠져있다는 느낌입니다. 혁신도시는 원래 산학(産學)연관 도시로 구성돼야 합니다. 주변에 연구소와 주거시설, 첨단공장 등이 들어서서 클러스터(산업집적지)를 이루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공공기관과 주거시설만 들어있는 신도시 개발에 그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나주혁신도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요?
나주의 라(羅)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직접적 의미로는 비단, 그물이라는 뜻이지만 고대역사에서는 ‘태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집트의 태양신이 나신(羅神)입니다. 신라(新羅)는 신태양제국이란 뜻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영산강 옹관문화를 꽃피운 고대 도시인 나주는 ‘태양고을’입니다. 빛고을인 광주보다 훨씬 의미가 크지요(웃음). 그래서 혁신도시와 나주지역 산업단지에 태양광발전산업 등 신재생에너지사업의 클러스터를 이뤄서 나주를 명실상부한 태양의 고을로, 명품도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주에 거대한 ‘한전’ 본사가 옮겨온다는 것을 10년 전에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한전연구소도 옮겨오고, 한전과 관계를 맺고 있는 150~200개 자회사와 협력사들을 나주로 불러모아야죠. 국내외 에너지 관련 기업과 연구소를 유치하는데 나주시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혁신도시안에 에너지대학원를 설립해서 광주첨단단지에 있는 광주과기원의 우수 인력들이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쾌적하고 안락한 시설의 혁신도시에서 고급 인재들에 의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생산돼 이것이 미래 먹거리산업을 창출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나주가 발전하려면 그런 새로운 물결과 흐름을 받아들여서 소통하고 융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이 정체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박사님은 원래부터 상아탑에 익숙한 학자풍이셨나요?
아닙니다. 제가 알고보면 사연이 좀 많은 사람입니다.(웃음) 순천고 3학년 때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무렵에 5.18 항쟁을 겪었어요.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이 깊게 가슴속에 박혔지요. 용산미8군 카츄사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취직보다는 나라를 먼저 걱정하게 되더라고요. 87년 고려대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경기도의 자동차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위장취업이지요. 7년동안 노동운동의 조직가, 전략가로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일까요. 왠지 허전하고, 다시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고려대 대학원 정외과에 입학해 최장집 교수 밑에서 노사관계와 정치학을 연구했습니다.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최교수님으로부터 지도받았지요. 공부를 병행하면서 한국노총 정책기획국장, 노사정위원회 노사관계위원으로 일했고, 노무현 정부의 핵심부서인 국가균형발전위에서 밤을 새워 근무했습니다.

그후에 병이 도져 한국노총이 주도한 ‘민주사회당’ 창당작업을 주도하기도 했고요. 그러고보면 제가 좀 가만히 못있는 성격이지요(웃음).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여기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국무총리실 산하 연구기관인데, 내년에 세종시로 옮겨갑니다. 열심히 근무하다 퇴직하면 당연히 고향에 내려가 살 생각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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