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암길

  • 입력 2013.08.19 10:18
  • 기자명 양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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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우물이 가정과 동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 장화홍련, 해님달님과 같은 전래동화에도 우물이 등장하고 “우물 안 개구리”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우물은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장소였다.
생명, 정화, 부활, 농경, 왕권 등의 상징성을 가진 곳으로 마을 중심공간이며 오염시켜서는 안 되는 성스로운 곳이다.
사람들이 만나 물건을 교환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마을생활의 중심공간이었다. 하지만 상수도의 보급으로 사라져갔고 각종 오염물질의 증가로 더렵혀져 먹는 물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옛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최근에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옛 우물을 복원하거나 주변정비를 하는 추세기는 하지만 식수로의 탄생은 멀기만 하다.
기억 속에서만 남아 이제는 역사와 전설이 되어 우리 곁에서 속내를 비추며 명맥을 유지하며 손짓하는 나주의 대표 우물을 찾아 나선다.

호 남선이 복선된 이후 폐선이 된 자전거 도로 주변, 완사천, 영산 도내기 샘, 미천은 자전거로 라이딩을, 전통수종이 우거진 도로를 따라 워킹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 우리들을 초대한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와의 만남을 고려사에는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주역 앞 강물이 둥글게 곡류하여 둥구나루라 했던 목포에 배를 정박하고 상류 쪽에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가보니 아리따운 아가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물 한바가지 청하자 버들잎을 띄워 마시게 하니 연유를 물었고, 말 달려 왔으니 급하게 마시면 체할까봐 그리 했다는 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인연으로 다음을 이을 태자를 얻으니, 왕건을 이어 2대왕 혜종으로 등극하였다.
탄생을 기념하여 흥룡사를 세우고 그 안에 혜종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전설만이 회자되고 있다.


나주를 어향으로 만든 빨래 샘을 뒤로 하고 도내기샘으로 간다.
창틀 위쪽의 홈통을 창을 끼우기 위해 깊이 파낸 고랑처럼 깊은 샘이었을 도내기샘은 한학의 대가 이서구가 천기를 읽고 세상을 꽤나 시끄럽게 하겠다고 했던 양씨 성을 가진 여인, 커가면서 자태가 곱고 소리도 잘해 인근 총각들 애를 태우게 했던 여인, 세도가 김좌근의 애첩으로 권세를 부려 나주 합하라 불렸던 여인, 한때는 나주에 구휼미를 풀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는 김좌근불망비를 세우게 했던 여인의 우물가는 호남선 개통으로 기억속 흔적만 남겼다.


복원된 우물은 도내기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둠벙처럼 변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염찰굴, 어장촌, 영산창, 나위소 신도비를 지나 미천에 이른다.
동서남북에서 당산나무가 감싸고 있는 제창마을 중심에 자리한 미천서원 강당 뒤안에 선다.
7년 가뭄에도 끄떡없다는 샘은 관리 소홀로 이끼가 끼어 목축일 엄두는 내지 못하고...학문하는 유학자였던 허목선생의 눈썹은 눈을 덮을 정도로 길었고 그래서 호가 미수, 선생의 학문을 기리고자 나주에 서원을 세우고자 했다.


임제선생의 외손자였던 관계로 회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제창마을 사람의 물 길러 다니는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다. 이곳 제창마을에 서원이 있는 이유다. 저 멀리 영산강의 물이 굽이굽이 돌아 구진포가 된 곳이 보인다.
어릴 적 시원한 우물물 길어다 보리미숫가루 타먹었던 기억이 살아난다. 누구는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이 되고, 누구는 세도가 실각 후 비명에 갔지만 상추 씻는 처녀의 쭉대기값의 노래로 나주 여인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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