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끝자락에서 같은 꿈을 꾸다

고 김성중 농민회원

  • 입력 2013.09.02 14:58
  • 기자명 박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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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아니 그의 흔적을 만나러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람. 아니 젊은 나이 못지 않게 힘겹게 살았을 세월은 나이를 넘어 너무나 긴 세월이었을지도 모를 사람.


봉황면의 지적장애2급 고 김성중 농민회원이다.
어렸을 때부터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위분들은 기억하고 있다.


옛날 시골에 가면 꼭 한사람씩은 있었다는 바보.
마을 아이들의 놀림거리도 되고, 잔치집의 거추장스러운 존재기이기도 하고, 그래도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꼭 와서 참견하다가 핀잔을 듣고 한켠으로 밀려나듯이 쫓겨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고 김성중씨였다.
그런 그가 지난 8월 21일 생을 마감했다. 향년 52세였다.


1987년, 나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수세거부투쟁이 전개되고 농민회가 건설되면서부터 활동했던 이들이 남다르게 기억하는 이가 바로 그다.

남루한 옷차림에 항상 붉은 머리끈을 질끈 메고, 팔목에도 띠를 묶곤 했던 이.
농민집회만 열리면 그 누구하나 알리는 이 없어도 집회장에는 그가 있었다.

 

대회 주최측에서도 그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안전사고의 우려도 있었고, 두서없이 세상을 향해 울부짓는 그의 주장은 때론 터무니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미련스럽고 근면하게 집회에 참석했다.
누구하나 살뜰히 챙겨주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농민회원들은 기억한다.

고 김성중 회원의 부친은 빨치산 활동 전력이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가족 역시 힘든 세월을 살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면 행정에서는 지적장애2급으로 등록되어 있다.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의하면 고인은 어렸을때부터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너무 울기만 해서 핍박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후 성인이 되면서 점차 좋아진 적도 있었지만, 40대가 넘어가면서 육체와 정신이 점점 악화되었다고 기억한다.
90년대 농민회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가 고인도 최고의 활동량을 자랑했었다. 심지어 경상남도 울산에서 열린 울산현대자동차 집회현장까지 단독으로 원정간 사례는 농민회원들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세상의 이치를 얼마나 이해하고, 농민집회에 참여할까? 아니면 핏속에 저항유전자라도 따로 있는 것일까?
지적장애2급 고 김성중이 우리에게 묻는다.


“전국에 있는 대학생 동지들이 전부 나주로 집결하기로 했으니까, 좀만 기다려줄 수 있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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