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변에 꽃피웠던 1,500년 고대문화의 숨결

나주, 그리고 반남은 ‘고분의 땅’ 역사기행을 떠나

  • 입력 2013.11.11 13:36
  • 수정 2013.11.11 13:45
  • 기자명 김종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대문화의 숨결, 반남고분군(사적 제513호)


나주시 반남면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고대문화의 꽃을 피운 곳으로 자미산을 중심에 두고 약 40여기의 고분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반남 고분군에 가려면 광주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내려간다. 나주에서 13번국도를 타고가다 영암방면 2㎞ 지난 지점에서 오른쪽 반남면 방향 지방도로 접어들어 10㎞ 가량 가면 커다란 동산이 보인다. 바로 덕산리 고분이다.

▲ 반남고분군
▲ 반남고분군

고분 옆에는 안내소가 있으며, 해설사가 상주한다. 그리고 옆에는 대형옹관묘와 부장품, 복암리 고분에서 발견된 왕관 등을 함께 전시해놓은 전시관 있고, 길 건너에는 국립나주박물관이 있다.
복암리 고분은 여기서 10㎞ 떨어진 다시면에 있는데 1998년 3월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평야지대에 4기가 있다. 3호분은 한 분구 내에서 옹관묘(22기), 수혈식 석곽(3기), 횡구식 석곽·석실(3기), 횡혈식 석실(11기), 석곽옹관(1기), 목관묘(1기) 등 41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이다. 이른 시기의 옹관고분은 지면을 약간 파고 옹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분구를 쌓았으나 후대에는 분구를 쌓은 후 정상부에 흙을 되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고 분구의 규모도 커진다.


이처럼 옹관을 묘제로 사용하는 형식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며, 한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묘제의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며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대안리 일대에는 12기가 분포하는데 제9호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는데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 고분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이때 금동관(국보 제295호)을 비롯한 금동 신발, 금반지,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구리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 신촌리 9호분을 재발굴조사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 토기 32개가 출토되었다. 원통형 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교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신촌리 출토 독무덤
▲ 신촌리 출토 독무덤

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심 축조연대는 신촌리, 대안리와 유사한 5세기 중엽~후반경으로 판단된다.
반남 고분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10호분은 석실분으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 세력이 진출하면서 토착세력의 옹관묘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고분유적권-자미명당길

삼포강의 명산 자미산과 고대 최고 지배자들이 묻혀 있는 고분 명당들, 고려시대의 유명한 명당인 반남 박씨 벌명당 등 천하 명당이 모여 있다.
자미산은 우주의 중심이 되는 명당으로 고대에 만들어진 자미산성이 있다. ‘자미’는 은하계의 모든 존재를 생성하게 된 근원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곳으로 중국에서는 황제가 머무는 궁궐이름으로 사용한다.


자미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고대 왕국이 있었던 시대를 상상해 볼 만 하다. 자미산 아래에는 많은 고분들이 펼쳐져 있어 고분 탐방로를 따라 가면 1,500년 전 내륙의 바다인 영산강을 통해 일본, 중국, 동아시아와 끊임없이 왕래하며 다양한 문화들이 용광로처럼 섞이고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던 영산강 고대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국내에서 유일하게 고고학 전문 박물관인 국립나주박물관에 들러 다양한 전시와 체험을 즐기는 것도 이 코스의 큰 재미이다.

반남 벌명당 전설

반남 박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는 이웃마을에 사는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박지관은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느긋한 산허리를 둘러보더니 덕흥리 동쪽에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러나 박지관이 의심스러워 뒤를 밟아 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박지관이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박의는 재빠르게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부인이 “호장어른 묘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나요?”라고 묻자 박지관이 기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르쳐 줬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한 죄로 화를 입을 것 같아 그 자리를 살짝 피해 좀 위쪽에 있는 자리를 잡아주었지.
이를 들은 박의는 이튿날 박지관이 말한 천하의 명당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박지관은 박의에게 “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는 피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자리가 더 좋을 듯 싶어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지관은 “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일세. 내가 화를 입을 것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라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런데 박의가 다시 구덩이를 파려고 하니 구덩이에서 새만큼이나 큰 벌이 솟아 나오더니 고개로 넘어가던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 고려 때의 아전이었던 박응주의 후손은 현손 박상충이 예조정랑에 이르고 이어 벼슬실이 끊기지 않아 조선시대에 반남 박씨는 명문거족이 되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 ‘벌고개’라 부르고, 박응주의 묘자리를 ‘벌명당’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는 벌고개 바위에다 이를 기려 ‘봉현(峰峴)’이라 새기고, 오늘날까지 매년 시월 보름날 박지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한다.

나주국립박물관 오는 22일 개관

국립나주박물관은 1,500여 년 전에 축조한 반남 고분군의 유적 속에서 느림과 치유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대지면적 74,295㎡, 지하1층/지상2층 건축연면적 11,086㎡인 국립나주박물관 인근에는 사적 제513호인 나주 반남고분군(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404호) 등이 있고, 삼국시대에 축조된 자미산성이 인접해 있어 자연과 고분군 속의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 국립나주박물관
▲ 국립나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시기 옹관고분 문화를 중점 조명하는 박물관으로서,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국보 제295호), 최희량 임진왜란첩보서목(보물 제660호) 등 국가지정문화재 4점, 기타유물 1,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또 국립나주박물관은 최초로 관람객들이 수장고 내부를 직접 볼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를 운영하며 체험전시 공간을 확대하고, 박물관 옥상정원을 개방했다. 박물관의 여러 공간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만든 ‘새로운 개념의 열린 문화공간’이다.

고분군이 아주 산책하기에 적당한 크기로 국립나주박물관이 생기면서 2시간 정도 천천히 돌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에 국화 꽃이 활짝 피었을때 잠시 산책 나들이 삼아 다녀 올만한 곳이기도 하다.

<스토리 코스>
덕산리 고분군 → 신촌리 9호분 → 벌명당 → 자미산 → 대안리 고분군 → 중대마을 삼거리 → 성안마을 → 신촌리 고분군 → 주막거리 쉼터 → 국립나주박물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