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설재서원

  • 입력 2006.11.14 15:03
  • 기자명 예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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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번호 : 전남문화재자료 제93호
 지정연도 : 1984년 2월 29일
 소재지 :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강당 정면 2칸 측면 2칸
 면적 : 207평(684㎡)
 분류 : 서원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되어 현재는 9위를 향사하고 있다.
숙종 19년(1693) 설재 선생의 5세 손으로 세종조에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공 영모정 정식(鄭軾·1407~1467년)이 추배되었다. 숙종 38년(1712) 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경종 3년(1723)에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하고, 암헌(岩軒) 신장(申檣·1381~1433)과 후손인 일헌(逸軒) 정심(鄭諶·1520~1602년)을 추배하여 4위가 배
향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00년 영모재를 복원하여 제향하다가 1953년 서원을 복설하면서 이때 창주공(滄洲公) 정상(鄭詳·1533~1609년)·경원공(景源公) 정여린(鄭如麟·1564~1640년)·죽우당(竹友堂) 정란(鄭瀾·1583~1656년)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1344~1423년)·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추배되어 있다.
정가신(鄭可臣·1244~1298년)은 나주인으로 자는 남헌, 호는 설재, 시호는 문정공이다. 고종 46년(1259)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충열왕 6년(1280) 승지가 되었다. 충열왕 10년(1284) 밀직학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한 후 1290년 정당문학으로 사부가 되어 세자를 따라 재차 원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로서 3차 원에 다녀왔으며 첨의찬성사·세자이사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정초는 설재의 증손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 호조판서를 지냈다. 신장은 고령인으로 보한재 신숙주의 아버지이다. 140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부제학 정조참판을 지냈다.
건물구성은 사당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전면 반칸은 개방되어 있다. 가구는 5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고 전면과 남측면으로는 반칸폭의 퇴를 두었다. 내삼문이 있고, 외삼문 대신 강당 측면으로 4각 대문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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