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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어느 자활성공자의 수기

“자립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2008. 01. 07 by 마스터
오늘 일을 마치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청명한 하늘위로 떠다니는 구름은 오래전에 본 평화로움과 고요함이었습니다. 여름동안 불었던 태풍과 폭풍을 이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승리한 자연의 평화로움입니다. 지금의 제 마음도 이제는 정리된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한때 온 국민이 겪었던 IMF는 우리가족에게도 닥쳤고 잘 나가던 가게는 집주인의 부도로 경매처분 되어진 이후 설상가상으로 이혼마저 하게 된 저는 세 아이들의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때는 상가 임대차 보호법마저 없었던 터라 완전히 길바닥에 나앉게 던 아이들과 저는 월세 120만원에 집을 어렵게 구하게 되었지만 당장 발등의 불은 일자리였습니다. 막상 나이 사십이 되어 새로운 직업을 찾으려 보니 마땅히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일은 공장 일. 아침 7시에 준비하고 출근하랴, 아이들 학교 보내는 채비도 하기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아들이 그 시간에 일어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하였고, 작업 환경도 참 열악했고 문제는 고생한 만큼 보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네 식구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후 보수가 많은 식당일을 옮겼고 오전 9시부터 10시반 까지 하루 종일 하는 식당일은 중노동으로 한달 동안 꼬박 일하여 받는 월급은 120만원. 공장에서 일하던 것보단 많이 형편이 나았지만, 그 흔하던 제철에 나는 과일이나, 좋은 옷 한번 사주고 싶어도 차마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왜 내가 살아 있는가? 과연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날은 밤새 아이들 몰래 우는 날이 태반이었습니다. 존재의 이유마저 생각조차 못한 채 저녁이 되면 피곤에 지쳐 떨어지고 아침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서 출근을 하는 하루 하루가 반복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을 지나고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이가 먹어서도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그래도 아이들 건사하며 살아야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 시기에 신문을 통해 자활후견기관을 알게 되었고 면접을 보았습니다.

자활후견기관을 통해 처음에는 세차팀에 두 번째는 도배팀에 합류하여 팀원들과 영세민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급자 대부분이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이기에 짐을 밖으로 내놓는 일부터 짐을 들어서 방까지 들여놓아야 도배가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곰팡이가 피어있는 집에서 기침을 하면서도 대충 사시는 분들과 쥐구멍이 송송 뚫린 집들을 베니어판을 잘라서 못을 박아 주고 장롱 위며 아래며 쥐똥들로 가득한 것을 우수수 치우고 나면 어지간한 비위로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흙이 다 패여서 떨어지고 난 흙벽들을 흙과 짚을 이겨서 틈을 메우고 초배지를 바르고 도배를 해야 할 집들도 있었습니다. 심난해 보이던 집들도 우리의 손이 들어가면 깨끗해 졌습니다.

“도배는 예술이구나” 금새 새로운 집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아픔과 슬픔을 같이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후견기관에서 도배기술자를 초청하여 도배 기술에 대한 강의와 현장실습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 드디어 소망장식 공동체 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한창 고2, 고1, 초등학교 5학년을 둔 가장으로 공동체팀에 합류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조건부수급자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 “불확실한 성공의 여부도 모른 체 공동체 팀으로 갈 것인가?”는 당장 소득과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뒤돌아보면 자활후견기관을 다니게 된지 만 2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다니면서 시간적으로 많은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녀들을 챙길 수 있어서 참으로 좋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월급 외에 부족한 생계비도 도움을 받고 근로장려금 제도가 있어서 가계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해마다 없어지는 월세보증금을 줄이기 위하여 동생에게서 1,200만원을 빌려서 전세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한달에 조금씩 갚아나가는 식으로 내 돈을 모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또한 다달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기숙사비며 학원비, 그리고 대학을 보내기 위해 지금부터 등록금 마련마저 준비도 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어느덧 저를 이해해 주는 성인이 되어갈 즘엔 저도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라는 딱지를 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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