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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끝나지 않는 5월 - 이호균 유족회장

총을 든 18세 아들의 죽음

2011. 12. 16 by 김준 기자
해마다 찾아오는 5월은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마음 한 쪽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으로 새겨진 5ㆍ18민중항쟁 때문이다.

그래서 항쟁의 주역이자 고통의 기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는 민초의 목소리를 찾았다.

기록되지 않는 민초의 기억을 통해 5ㆍ18의 참 의미와 대동 세상을 이뤘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들의 꿈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나주에서 5ㆍ18 유족회를 이끌고 있는 이호균 회장이 바로 오늘의 증언자이다. 그의 5ㆍ18에 대한 기억의 편린을 들었다. 누구보다도 아픔과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5ㆍ18과 함께 했기에 슬픔과 희망을 안고 있다.

그의 아들 이종연 군은 당시 꽃다운 18세였다.

1980년 5월 그해 들리는 풍문을 한 귀로 흘리며 그저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이호균씨.

영산포 장날인 20일 금성파출소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도 그와는 관련 없는 일로 애써 치부했다. 21일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온 이 회장은 총을 든 아들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서 갔다 줘라 니가 왜 총을 갖고 다니냐"며 화를 냈다.

아들 종연이는 서슬이 시퍼런 아버지의 말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뒤쫓아 갔지만 이미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별일 없으려니 하고 평상시처럼 일에 나섰다. 나주여고 앞에 있는 밭에 딸기를 돌보았다. 생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오후 늦은 시간 원예공판장 아들이 밭에 와 종연이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얼마나 다쳤냐"고 물었더니 "조금 다쳤다"며 걱정 마란다. 다행이다 싶었더니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막둥이 종인이가 찾아와 넷째 형 종연이가 죽었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전했다. 하늘이 노랬다.

그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집에 돌아와 멍하니 있었다.

저녁 늦게 버스가 도착했고 시위학생들은 죽은 아들을 마당에 내렸다.

학생들이 태극기로 아들의 몸을 감싸고 애국가를 부른 후 "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겠다"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 회장은 밖에서 죽은 사람은 안으로 들일 수 없다는 풍습에 따라 할 수 없이 사랑하는 아들을 마당에 안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어수선해지고 공수부대가 쳐들어온다는 풍문이 돌았다. 마을사람들은 나주여고(당시 나주여자상업고등학교) 뒷산으로 피했다. 이 회장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뛰었다. 그러나 200여 미터를 도망치다 "아들의 주검을 두고 나만 살아 피난해야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죽은 아들을 지켰다. 당시 마을사람 몇 분이 함께 지켜줬다. 너무 고마웠다. 다음날 아침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담고 중앙초등학교 뒤 공동산에 묻었다. 피 터지는 울음과 함께.

그로부터 한 달 후.

아들의 죽음을 신고도 안했는데 검사가 직접 내려와 묘를 파 머리관통상이란 사망원인을 확인하고 재 매장했다.

5ㆍ18이 폭동에서 민주항쟁으로 정립되기 전까진 5월이 오면 나주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찾아와 외출도 못하게 막았다. 그땐 일상이지만 기막힌 현실이었다. 아들의 묘도 찾지 못하는 이 고통을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넷째 종연이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더 따랐다. "내가 조금만 더 크면 돈을 많이 벌어 호강시켜 주겠다"는 종연이를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종연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도 2010년 4월 26일 심장병을 앓다가 아들 곁으로 갔다.

이 회장은 "이제 하늘에서 오붓이 만나 점심도 못 먹인 미안함과 호강시켜 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송스러움을 서로 얘기하며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며 붉게 물든 눈시울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끝내 떨쳤다.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한 가족에 슬픔과 아픔을 안겨준 5.18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까지도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속으로 삭히며 살아왔고 사실 자신은 5ㆍ18민중 항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다만 아들의 죽음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아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다만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당당하게 아들의 의로운 행동과 선택이 옳았음을 알고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제는 망월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아들이 편히 쉬기를 바랄뿐이다.

이현영 기자

midon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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