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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5ㆍ18민주유공자나주동지회 김기광 회장

'나주지역의 민중항쟁증언록 편찬해야'

2011. 12. 16 by 김준 기자
우리의 지나온 역사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희망을 열어온 역사이다. 그 희망을 만들어온 것은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해온 우리의 민초들이다.

5ㆍ18 광주항쟁은 이 땅의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싸웠던 민중의 역사이다. 어느 한 영웅에 의한 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민초들이 흘린 피의 상징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의 끝자락에 5ㆍ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를 찾았다.

치열했던 광주의 그날을 살아간 평범한 사람가운데 한 사람인 5ㆍ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 김기광 회장을 통해 31년 전 그날의 기억과 함께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를 지켜준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지켜준 그날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면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지키려는 순수한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을 진정성 있게 바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함께 활동한 기동타격대 대원이었던 화순출신 현채씨가 2009년 자신의 집에서 어린자식을 뒤로하고 삶을 마감했다는 아픈 소식은 아직도 김 회장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31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날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날의 아픔으로 현재까지 정신적 충격(트라우마)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과 치료가 절실하다"는 말과 함께 보상체계 또한 다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김 회장은 1980년 5월 고3이라는 학생 신분으로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는 기동타격대원이었다. 5월 26일 계엄군의 진압을 목전에 두고 도청에서 나오라는 안내방송을 들으면서도 고 윤상원씨의 '도청을 비우면 역사에 오욕으로 남는다. 절대 비울 수 없다'는 절규가 항상 가슴속에 울린다는 김 회장.

그는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 까지 남은 100여 명 가운데 약 40여 명이 주축이 되어 기동타격대를 조직하고 2층 상황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사수한다'는 선서를 함께 했다.

그 선서를 지키면서 계엄군의 도청진압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김 회장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순간이다.

김 회장은 공수부대에 의해 굴비 엮듯이 뒤로 포박을 당해 상무대로 이송되어 내란중요업무종사ㆍ내란중요업무종사 방조ㆍ내란실행ㆍ내란무화실행ㆍ계엄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형집행 면제를 받을 때까지 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 회장은 "5ㆍ18은 순수 민초들의 항쟁이였다"면서 "정치권에서 순수한 민족운동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주민중항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5ㆍ18관련 기념재단에는 당시의 당사자는 없는 문제점과 단체위주의 주인공 없는 행사는 지양해야한다면서 3곳으로 나눠져 있는 단체들의 통합 또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5ㆍ18민주유공자 나주동지회는 활동초기부터 구속자ㆍ부상자ㆍ유족회 등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120명의 회원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5ㆍ18민중항쟁에서 광주를 제외하고 항쟁의 불길이 솟아오른 곳은 나주와 해남, 순천, 목포이다"면서 "해남은 민중항쟁증언록을 편찬했지만 아직 나주지역의 항쟁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없어 아쉽다"고 말한다.

그는 또 나주동지회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나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민중항쟁에 관련된 증언과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아픈 역사의 기억을 떨치고 당당한 역사로 새롭게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의 광주항쟁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현영 기자

midon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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