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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행의정지기단 양성숙 씨

“나주는 단점보다 장점 많다”

2007. 04. 02 by 마스터


◀ 맨 왼쪽 양성숙
행의정 지기단 총무

나주는 고향의 마을과 진배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고향하면 마을 옆으로 적성강이 흘러 내려가 어린시절에는 유독 물놀이와 다슬기를 잡으며 다정다감하게 보내었던 정감 넘치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는 사람.

남원양씨 집성촌에서 태어나다 보니 초등학교 전교생이 양씨 성을 가진 학생뿐이었다며 웃어 넘기는 소박한 아줌마, 그리고 그러한 자연환경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결혼 후에 나주로 와서 지금껏 살아와서도 성격이 털털하고 약간은 소심하다며 세상 살아가는데 전혀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남원양씨의 정착설화에 어느 도승이 고려때 작제학 벼슬을 한 양도생의 후손을 만나서 자신이 살던 집을 넘겨 준 뒤 그때부터 600년 이상을 대대로 자가 일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순창군 동계면 구미마을(귀미마을) 자가촌에서 부친 양충규 옹과 최정남(66) 모친 사이에서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는 양성숙 행의정 기지단 총무가 그런 사람이다.

유년시절의 추억

지금은 동계초(순창면 동계면)로 통폐합되었지만 구미분교(1958년 6월 7일 설립) 5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부친 최옹을 따라 고향을 떠난 후로 도시에서 쭉 살게 되었다는 양 총무는 전주에서 금암초와 중앙여중 및 유일여고를 거쳐 원광대(한문교육과 졸)를 졸업할 무렵 캠퍼스 동아리 활동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순천대(임학과) 출신 손등삼 부군(삼영동)과 1991년도에 백년가약을 맺고 나주로 내려왔다.

농촌하면 유년시절 길러주시고 초년기에 인사성이 없다며 자신에게 꾸지람을 많이 하시던 유순덕 조모가 언제나 변함 없이 시골 고향집을 말없이 지키고 있어서 방학 때만 되면 시골로 내려갔고 또한 대학 때 사회문화연구회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농촌으로 농촌봉사활동도 많이 다니기도 했기 때문에 전원풍의 나주가 별로 나설지 않았다는 양 총무는 시댁이 농사를 지어서도 결혼 초기부터 거의 집안일과 살림만을 해왔다고 말했다.

나주에서 산지가 17여년이 흘렀지만 농사경험은 시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시작한 벼농사로 고작 4년 정도밖에 안된다는 양 총무는 그 당시에도 논두렁 풀베기, 농약 할 때 잡아주기 등 평상시에 하듯이 농사에 임한 것이 전부라고….

사회참여로
마음과 몸이 가벼워 졌다…
자녀는 바르게 커 주길 만 바래

그래서 그런지 전형적인 도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외모를 지닌 양 총무는 우연한 계기에 나주지역과 역사·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 교육과정을 통해 2003년도부터 나주에서 문화관광해설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도 반남 고분군에 위치한 관광안내소에 근무를 하던 양 총무는 광주에서 모자간에 공산면 MBC드라마‘주몽’촬영지인 삼한지 세트장을 들러서 반남 고분군을 보러 오게 된 방문객을 맞아 환한 웃음을 띠며“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가요”라며 말을 건네며 방문객이 물어오는 말에 상냥하게 답한 뒤  10월에 있을 반남국화축제 때에는 꼭 방문해 달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자녀교육

두 아들 모두 부군 손씨와 함께 작명해 지어주었다는 양 총무는 큰아들 녹진(16)이는 소나무를 생각하면서 이름을 작명한 반면에 막내아들 현진(13)이는 별 생각 없이 어질게 성장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자신의 삶에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과정에 대해선 후회는 없다는 양 총무는 자녀들의 교육은 무관심할 정도로 아이들을 대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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