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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장애를 뛰어 넘는 이웃사랑

“마음의 장애가 없는 나주 바래”

2007. 04. 09 by 마스터


열 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 복병으로 평생 장애가 되었다는 사람, 그 병으로 매일 고통 속에서 보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제때에 못 받아서 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전신이 거의 굳어져 버려 마음까지 닫힐 뻔한 마음 넓은 남자,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과 벽을 쌓으려고 고향에 내려왔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장애우를 생각해내고는 그 모든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들에게 다가서서 앉아주며 사랑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 

‘따르릉’전화소리에 아파트 거실에 마련된 이부자리 위에서 누운 채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가며 겨우 가까스로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아서 자원봉사자를 장애인에게 연결해주며 길게 숨을 내쉬어 보이는 부름의전화목사골봉사회 회장 이계천 씨.

부모가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자신의 병을 치료한 덕택에 비장애인과 다름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이 회장은 일찍부터 진학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약값을 위해 디자인회사, 출판사, 그리고 전자회사에 취직해가며 마지막순간까지 병마와 싸웠지만 결국에는 89년도에 쓰러져 앓아 누어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전신 불구가 되었다고 전했다.

한때 심한 고통과 우울증에
삶의 의지 잃어

그 후 고향인 다시면 신석리로 낙향한 이 회장은 6여년간 꿋꿋하게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써봤지만 병 치료를 제대로 못하여 몸이 굳어가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2년여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외출 시 몸이 불편한 노모가 자신을 뒷 수발해 가며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하는 것을 보고는 아차 싶었다는 이 회장은 그날로부터 주변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웃의 장애인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우울증을 이겨내고 97년부터 장애인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때마침 부름의 전화 광주봉사회 김종원 회장을 알게 되었다는 이 회장은 그에게로부터 많은 도움과 조언을 받은 결과 1999년 3월에 부름의전화목사골봉사회의 발대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부름의전화목사골봉사회는 독지가와 후원회원들이 보낸 성금으로 매년 4월과 10월에 장애인시설에 거주하지 않는 재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2박 3일간 야유회 및 신혼여행 보내주는 것은 물론 매년 11월경에는 일일찻집을 열어 그 수익금으로 장애인들에게 컴퓨터를 보급해 주거나 월동비(1드럼씩 20~30여명분)를 지원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장애우를 도우면서 가장 보람되었던 일은 자신이 소개한 장애인 커플들이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고 잘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는 이 회장은 나주는 타 지역에 비해 봉사단체도 많고 복지시설도 많은 등 사회복지 쪽이 잘 갖추어져 있는 관계로 시민들의 의식이 매우 성숙해져 있다며 장애인의 대한 시민들의 태도도 긍정적이고 봉사도 많이 하는 편에 속한다고 언급했다.

나주가 장애인 편견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나주지역의 한 공동체 속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시민이라며 일상에서 몸이 불편할 뿐 모든 사고나 욕구는 비 장애인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 회장은 나주가 서로를 이해해주고 안아주며 포용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중증 장애인이 봉사한다고 나설 때 왜 사느냐며 비난을 받는 등 장애인이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던 그때의 일이 지금은 오히려 힘이 되고 덕이 되었다는 이 회장은 정부의 가정도우미 파견사업이 활성화가 되면 장애인들도 사회참여를 통한 적극적인 활동들을 할 수 있게 된다며 6년여 전 보다 장애인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 또한 매우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강조했다.

매월 1회씩 자체 회보인 둥지를 발간하여 서로의 소식을 지면을 통해 전달한다는 이 회장은  가까운 장래에 모든 장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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