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전개

  • 입력 2008.12.01 18:16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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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가장 우리 민족에게 가슴벅찬 날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다. 우리는 35년간 일제의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일제의 만행에 신음하던 우리는 대한독립만세를 하늘 높이 외쳐댔다. 목이 터지고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은 조선총독부의 외신통제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에 어두워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주의 민족운동가들은 해방의 기쁨을 채 느끼기 전에 전열을 정비했다. 그만큼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항일투쟁의 경력이나 이념 그리고 나이와 계층에 관계없이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녔다.
 
먼저 치안대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부를 결성하였다. 치안대장에 박공근, 준비위원장 김창용, 부위원장은 박준삼이 맡았다.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하자 치안대는 보안서로 이름을 바꾸고 박형배가 서장을 맡았다.
 
나주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곧바로 인민위원회로 바뀐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민족운동이 그 만큼 활발했기 때문이다. 전남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나주는 일제가 물러나면서 벌어질 상황에 대비 조직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탄탄한 조직적 기반아래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전환했지만 지도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인민위원회는 읍·면까지 모두 조직되었다. 나주의 인민위원회는 자치조직으로서 일제하의 민족운동과 토착세력이 주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이 실시되기까지 행정기능을 담당하고 적산을 관리했다. 그러나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남북한에 친소·친미 세력이 곧바로 형성된 것이다. 결국 민족운동세력간의 갈등과 외세의 개입으로 민족의 단결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인민위원회는 강제로 해산된다. 1946년부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산시키고 탄압국면에 들어간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1일 나주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서장 박형배와 군수 김창용 그리고 농민조합장 오정근, 보안서원 8명을 투옥시킨다. 인민위원회의 와해가 시작됐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민중들은 혼란에 빠지고 치안질서는 탄압국면에 들어선다. 일제하 친일경찰부터 다시 활개를 펴게된다. 인민위원회는 비공개 활동으로 전환되었지만 면지역 인민위원회 조직은 아직 건재했다.
 
1946년 3월 새로운 공개조직이 탄생한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이다. 나주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유찬옥, 박일섭, 최일숙, 이순채 등이 주도한다. 하였다. 우익세력도 독립촉성국민회 나주읍지부를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나주의 정치와 사회를 주도한 세력은 인민위원회였다. 1946년에 일어난 11월 1일 봉기는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항쟁의 연장선상이다. 10월항쟁은 목포부터 시작, 11월 하순까지 2부 12개 군에서 일어났다. 7천여명의 민중이 참여한 나주봉기는 전남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이었다. 나주경찰은 133명을 체포하고 15명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한다.
 
11월 1일 봉기에 많은 민중이 참여한 것은 미군정의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과 강제적인 식량공출정책에 대한 반감 그리고 외지에서 들어와 반주민적인 태도를 보인 경찰에 대한 증오심 등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27일엔 반남에서 군중집회가 있었다. 경찰은 총을 쏘아 이를 강제 해산시켰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나주의 좌익세력은 힘을 잃어갔다. 반면에 미군정의 비호를 받은 우익세력의 힘은 강화되고 있었다.
 
1948년 5·10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이항발이 무소속으로 출마, 한민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된다. 하지만 한민당은 나주의 정치를 선거를 통해 장악한다. 미군정의 핵심인 토착적인 자치세력의 거세, 중앙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 보수 우익 세력의 부상으로 지방정치는 예속의 길을 걷는다.
 
1948년 12월 21일 이승만의 특별지시에 따라 청년단체는 해산되고 우익 대한청년단이 창립된다. 되었다. 나주에서도 대한청년단 나주군지부가 결성된다. 지방정치를 우익세력이 장악하면서 일제하 항일운동세력은 점차 그 힘을 잃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민중은 신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의로운 나주인 하산 김철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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