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선 팀장의

근대사 이야기

슬픈 근대사 현장을 걷다

  • 입력 2010.05.03 17:31
  • 기자명 이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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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시작되는 나주의 근대사는 학생독립운동, 궁삼면 토지수탈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로 기록된다.

이와 함께 역사적인 사실을 간직한 근대건물 또한 아직까지도 우리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김은선 팀장과 함께 나주의 근대사와 시간의 흐름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근대건물을 찾아 역사의 재조명과 문화관광자원으로써의 가치를 격주간으로 되새겨 본다.

/편집자 주





첫골목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건물



한반도의 근대는 슬펐다.

'차이'를 '틀림'으로 인식하는 제국주의 열강 아래 우리는 폭압적인 방식으로 교육과 계몽을 강요당해야 했던 근대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주와 영산포는 영산강을 끼고 자리하여 교통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하였기 때문에 식민지 수탈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영산강 하구를 따라 바다로 나아가던 배는 호남평야에서 나는 곡식과 물자들을 대량으로 실어 목포로 운반하였다.

목포에서는 운반된 곡식과 물자를 해로를 통해 일본으로 혹은 청일전쟁 중인 중국등지로 실어 날랐다. 군수품 지원기지이자 식민지 수탈의 거점이던 나주, 영산포 일대는 물밀듯 밀려 들어 온 일본인들로 넘쳐 났다. 더불어 나주, 영산포의 거주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토지를 빼앗기고 점차 삶의 터전을 잃어 갔다.

그러한 경제적 수탈의 거점 역할을 하였던 곳이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다. 호남의 미곡을 거두어 들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담당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고 건물이 현재 비교적 그외양을 그대로 간직한채 영산포에 보존되어 있다.

홍어거리를 지나 영산강을 끼고 남아 있는 영산포 등대를 지나 걸으면 붉은 벽돌의 자그마한 이층건물이 유난히 눈에 띈다.

나주, 영산포를 수탈의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행정적 업무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이 아직도 그곳을 오갈 듯 보이는 그곳은 현재는 개인 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근대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자본의 물결은 또 다른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냈음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할 우리네 역사의 현장이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는 것은 뼈 아프게 슬퍼 해야 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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